오늘 우리의 고귀한 근원은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며 자막은 아랍어 어울락어(베트남어) 중국어,영어 불어,인도네시아어 독어,한국어 페르시아어,러시아어 포르투갈어,스페인어 태국어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고요하지만 용기있는 영웅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자비를 가진 깨달은 분들은 모두 동물에게도 인간처럼 지각이 있으며 사랑과 용기 보호,고통 슬픔 등의 모든 감정이 있음을 명확히 이해했습니다

통례의 동향과 사회기준에 대항하여 자비로운 채식을 생활화 하는 이들은 영웅인 것입니다 그들의 이상과 자비심은 진정 고귀하며 훌륭합니다 그 영웅들은 누굴까요 그들은 과거의 깨달은 스승들을 포함한 요가 수행자와 과학자 예술가,작가 유명인사 그리고 우리가 매일 보는 이웃들입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아름다운 동물 친구들과 모든 생물을 대신하여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훌륭한 채식인 분들께 찬탄과 감사로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수프림 마스터 TV 유명한 채식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로 가서 존경받는 채식가로 수세기에 걸쳐 『르네상스 시대의 만능 천재』로 정평이 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르네상스 남자는 누구일까요?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과학자 수학자,공학자 발명가,해부학자 건축자,식물학자 음악가,작가 동물 애호가였습니다 전설적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작가 헬렌 가드너는 『그의 관심의 폭과 깊이는 전례가 없었고 그의 정신과 인품은 초인처럼 보였다』 고 평했습니다

이탈리아 마체라타 대학의 카를로 베체 교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능 명사』로 묘사하였는데,이는 과학부터 예술까지 다양한 분야에 정열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동시대인과 달리 순수한 완전채식을 했음을 지적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채식주의자 천재의 생애에 대해 살펴봅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로 알려진 첫 번째는 조르지오 바사리가 써서 1550년에 출간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건축가 화가,조각가의 생애』입니다

그의 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료들이 직접 밝힌 이야기에 기초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삐에로 다빈치는 1452년4월15일 빈치의 토스카나 마을 에서 태어났습니다 5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앙키아노의 햄릿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프란체스코 숙부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릴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단한 탐구 정신의 비범한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여 교수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아버지의 가족과 사는 동안 그는 프란체스코 숙부 덕택에 과학적 관찰에서 예리한 흥미와 호기심을 계발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동굴 탐험은 흥미를 일으켰고 예리한 자연 관찰을 시작했습니다

갇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젊은 레오나르도는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 탐험을 계속했습니다 이러한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은 일생 동안 그가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도록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화가로서의 재능을 나타냈을 때,부친은 1466년 14살의 그를 베로키오로도 알려진 유명 화가, 안드레아 델 치오네의 견습생이 되도록 플로렌스로 보냈습니다 베로키오의 지도로 그는 국소해부 제도,세트 건축 석고상 제작 화학,목공 야금학,조각 모형 제작 등 많은 기술들을 배웠습니다 베로키오는 산드로 보티첼리와 기르란다이요와 같은 전설적 제자를 두었고 미켈란젤로의 예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전기작가 조르지오 바사리에 의하면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자신의 최우수 학생 으로 생각했습니다 베로키오 아래에서 견습 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첫 번째 후원자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였으며 공작의 후원 하에 레오나르도는 12사도와 함께 식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포함한 몇몇 걸작을 제작하였습니다

밀라노 대성당의 밀라노 대성당의 돔 설계도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과 함께 했던 일 중 하나였습니다 1502년에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보르지아 체사레의 군대 축성가이자 공학자로 일했습니다 1년 후 플로렌스로 돌아가 유망한 젊은 미켈란젤로와 함께 공공 건물인 베키오 궁의 벽화 2개를 그리는 일을 의뢰 받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마지막 후원자는 프랑스 왕인 프랑소아와 1세로 그는 이런 말로 유명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레오나르도 만큼 조각,건축,그림 철학에서 학식있고 뛰어난 사람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매우 존경해서 클루의 저택과 연봉 700 금화를 주었습니다 미술 외에도 과학자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론은 당대의 중세 방식보다 매우 앞섰습니다 생명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오로지 경전에 의존하기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을 관찰하고 관찰결과를 기록하고 자신의 질문에 답을 적었습니다

그의 조부로부터 배운 특유한 것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부분 일생 동안 일지를 썼습니다 식료품 목록 관찰결과,일상사 발명품과 설계도에 이르는 내용들을 상술했습니다 이 남은 유물들은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을 우리가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채식인이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수프림 마스터 TV를 계속 시청해 주세요 잠시 전하는 말씀을 듣고 채식주의자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좀더 살펴봅시다

유명한 채식인에 다시 환영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채식인이며 만능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계속하겠습니다 예술과 과학 외에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청렴과 민감함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특히 내면에 거하는 영혼의 신성한 빛을 끄는 것은 극악무도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과 생존을 존중하므로 타인에게 즉 동물 친구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상기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동물에 대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존중은 그가 채식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역사가 린 베리는 『유명한 채식인: 부처에서 비틀즈까지』 라는 강연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그리고 채식으로 살아간 그의 선택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고금의 가장 훌륭한 채식인 중 한 사람은 비건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아마도 그가 근대 유럽의 첫 번째 채식인이며 유명한 채식인 이었을 겁니다 사실,르네상스인 이라는 단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묘사하는데 쓰였지요 그가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으니까요

그는 해부학 뿐 아니라 영양학 분야에도 뛰어났습니다 실제로 그의 해부도는 아직도 교과서와 광학, 물리학,항공학 분야에 쓰입니다 그는 식이요법 분야에도 대담했습니다 그는 십대에 비건이 되었어요

그 이유나 방법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도 채식 생활 방식을 주장했던 미식가,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 연구와 고서를 번역한 결과였을 겁니다 그가 채식인임이 문서로 증명되었지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생애에 대해 집필한 조르지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도시에 있었을 때는 플로렌스 시장에 가서 새장에 갇힌 새나 사냥용 새, 가금류를 가지고 갈 수 있는 만큼 구입하곤 했답니다 그는 그 새들을 숲으로 데려가 풀어 주었어요 그래서 그는 서구에 채식인이 보편화되기 전 세기에 윤리적인 채식인이었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모장를 기초로 장 파울 리히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문학작품』을 1883년 발행했는데 이렇게 적혔습니다 『줄리아노 디 메디치에게 보낸 안드레아 코르살리의 최초 편지의 다음 흥미있는 구절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채식인 임을 믿을 수 있다 『구자라티(힌두교도) 는 피가 들어있는 어떤 것도 먹지 않으며 살아있는 존재에게 어떠한 손상을 주지 않는다네 레오나르도 다빈치 처럼 말일세』

1898년 유진먼츠도 그의 책『예술가며 사색가,과학의 남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서 안드레아 코르살리의 편지를 언급했습니다 『코르살리의 편지를 보면 레오나르도는 고기를 먹지 않았고 완전 채식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현대 채식인들을 수세기 앞선 것이다』

30년 후 1928년 에드워드 맥커디는 바사리의 저서를 바탕한 그의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신』에 적기를 『불필요한 고통의 실재를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살생은 그에게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맥커디 씨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채식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인용문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설명했습니다

『자연은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손상되고 파괴되기 쉬운 신체의 기관들을 보호하도록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주었지만 이동의 능력이 없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은 장애물에 부딪히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식물은 고통을 느끼는 감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만약 그들을 부러뜨리면 동물들처럼 기관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의 자비로운 식단은 그의 모든 그림에 묘사되었으며 그의 최대 걸작 중 가장 훌륭한 『최후의 만찬』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를 하는 탁자에 어떠한 고기도 없습니다

생의 말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철학과 종교에 집중했습니다 원래 무신론자인 그는 자연에 대한 관찰과 감탄으로 신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신께 순종하여 첫째 사랑을 실천하며 모든 것에서 주를 경외한다 두 번째는 신은 인간의 생명을 줄이거나 연장할 수 있어서이다』

그의 전기작가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찬탄 받았습니다 1527년 경 파올로 기오보는 『레오나르도 빈치 비타』에 적었습니다 『그의 기질의 매력과 탁월함과 관대함은 그의 외모의 기품과 견줄만하다 발명에 대한 그의 천재성은 놀라웠고 미와 우아함에 관한 특별히 장관에 관한 모든 의문의 권위자였다 그는 리라를 켜며 아름답게 노래하여 궁정 전체를 기쁘게 하였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전설적인 예술성과 빛나는 정신과 자비의 이상은 현재까지 논의와 연구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로 알려진 『르네상스의 채식인이며 만능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본 이태리 르네상스 시대로의 여행에 함께해주신 상냥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어지는 수프림 마스터 TV 스승과 제자 사이를 계속 시청해 주세요 신의 축복으로 친절과 기쁨 평온함이 가득한 주말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