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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말씀
궁극의 법문-1/3부 1989년 7월 7일, 홍콩


지혜의 말씀을 보고 계십니다
『궁극의 법문』 칭하이 무상사 강연
홍콩 1989년 7월 7일

청중들을 대신해서 모든 분들의 편의를 도모하느라 수고하신 스태프들께 감사드립니다 강연을 들을 때 편안하게 들으세요 너무 심각하지 말고요 함께 만난 이 시간을 즐깁시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심각할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물질적인 형상을 한 것은 모두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일단 우리 자신의 부처의 눈이 열리면 그 물질적인 형상을 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존재하고 우린 여전히 볼 수 있지만 때로 그들의 물질적 형상을 안 봅니다 예를 들면 연단에서 강연하는 사람은 없고 빛의 바다만 보일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환상 속에 있기 때문에 배워야 합니다 환상이 없다면 배울 필요가 없지요 오늘 여러분에게 불교와 천주교 및 다른 종교들의 관점에서 본 영적 수행과 우리 자신의 인격과 도덕을 훈련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살아있었을 때 그가 많은 명상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명상이 뭘까요? 그것은 우리의 힘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집중력을 흩어지게 하는 대신 다시 되돌리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명상입니다

왜 명상법이 그렇게 많을까요? 예컨대 석가모니 부처는 사람들에게 육체의 불결함을 명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 몸 안의 더럽고 불순하고 조잡하고 냄새나는 지저분한 부분을 떠올리는 거죠 이것도 명상법 중의 하나입니다 또 다른 명상법은 『해골』을 관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자면 명상할 때 다리를 접든 펴든 조용히 앉아있는 겁니다 조용히 앉아서 몸이 해골이 되는 상상을 하는게 핵심입니다 그렇게 성공하면 몸은 더이상 보이지 않고 해골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도 해골로 보입니다 그러면 육체적 욕망이 사라지고 그 육욕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호흡을 관한다』라고 불리는 명상법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흡이 무상하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죽잖아요 그 외에도 몸의 변화와 감각이나 심장 박동 또는 혈액순환 등을 관하는 것과 같은 여러가지 명상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가모니 부처는 『관음 법문』이라는 명상법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부처들이 수행한 명상법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오직 이 법문을 수행해야만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누구든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관음법문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 법문은 또한 수천억년 전 관음 법문을 수행해서 성불한 관음 보살이 수행했던 법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석가모니 부처가 왜 그렇게 많은 법문을 가르쳤는지 말해보죠 그것은 사람들 마다 필요로하는 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부처가 되길 원하는 대신 건강이나 집중력이 좀 더 나아지는 것만 바랍니다 그러면 사업이 잘 되고 공부를 잘하거나 세상사를 잘 해나가겠죠 그런 경우에는 물론 석가모니 부처는 성불하는 법문을 가르치지 않고 호흡이나 해골 또는 부정한 곳을 관하는 법문만 가르쳤습니다

해골 명상법은 육체적인 욕망이 강해서 그것을 조절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일단 해골을 보면 이성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수행하고 모든 여자들이 해골로 변한 걸 봤다면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어질 겁니다 부정한 것을 관하는 명상법도 육욕이 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육체적인 욕망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된 나머지 가만히 있질 못하고 고상한 생각은 커녕 욕망이 너무 강해서 일상 업무나 가족의 평화에 방해가 되어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육욕을 다스릴 법문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석가모니 부처는 누구나 수행하기 쉽고 몸도 마음도 하는 일도 그리고 식습관도 바꿀 필요가 없는 이런 법문들을 가르쳤던 겁니다 잠시만 호흡법을 수행하고 부정한 곳을 관해도 최고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적 욕망이나 정욕도 줄어들고 IQ도 높아집니다 어느 정도는 도움이 돼요,전혀 도움이 안 되는게 아니에요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법문이 또 있는데 비교적 수행하기도 쉽고 우리의 영성과 지능도 향상시켜 주는 법문이 바로 기도입니다 경전을 낭송하고 부처의 명호를 외며 절을 하고 회개를 하거나 고해성사를 하고 교회에 가서 찬송을 하거나 신이나 부처에게 도움을 청할 때도 일종의 수행을 하는 겁니다 아주 쉬워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훨씬 더 쉬운 또 다른 방법은 주문을 외는 겁니다 사원에 갈 필요도 없어요 집에서 외울수도 있고 언제 어디서든 외울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에서 가장 유명한 주문이 『옴마니 반매흠』이죠 여러분 아세요? 가장 인기있는 법문입니다 또 다른 주문은 『나무아미타불』인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 두 법문을 좋아하죠 요즘은 또 다른게 있어요 일련종이란 게 있는데 『나모 연화경』을 암송하는 겁니다 성구나 주문 또는 명호를 외는 것은 집중도 잘 되고 편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법문들을 수행하기 좋아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옴마니반매흠』을 외지 않아요 뭘 외는지 아세요? 『옴』을 욉니다 아마도 인도가 더워서 일을 너무 많이 하면 쉽게 지치니까 긴 구절 보다는 간단히『옴』이라고 하는지도 모르죠 내가 수년 전 양력으로 6월 여름날에 인도에 있었을 때 석가모니 부처가 성불했다는 곳을 가보려고 『보리 사원』에 순례를 간 적이 있었는데 걸을 수가 없었어요 걷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빨리 걸으라고 해도 기운이 떨어진 것 처럼 이렇게 걸었어요 인도 출신이 아니면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해요 그러니 기운이 적게 드는『옴』만 왼다고 탓할 수 없죠 많은 사람들이 『옴』만 외우고도 큰 이득을 봅니다 IQ 도 좋아지고 지혜도 생기고 건강도 좋아지고 신통력도 생기고 기운도 더 납니다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많은 이득을 봅니다

천주교 신자들도 성경에 쓰인 것을 수행하면 많은 이득을 봅니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십계를 지킵니다 살생,도적질, 간음,거짓말 등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매일 신의 은총을 구합니다 매일 같이 기도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지능도 높아지고 이 세상을 초월한 신통력이라는 것도 얻을수 있어요

왜 그렇게 많은 수행법이 있을까요? 불교의 법화경에는 관음 보살의 품성을 묘사해 놓은 『보문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불이 그녀의 얘기를 설명한 거에요 그는 그녀가 이 세상에 살아있었을 때 그녀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을 거라고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해탈을 구한게 아니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이 뭘 구했을까요? 아들을 원하거나 아름다워지고 돈이나 편안한 삶을 구했죠 그렇죠? 그런 걸 구하니 그런 걸 가지겠죠 그래서『관음보살』을 좋아하는 겁니다 뭐든 다 주니까요

그런데 그녀에게 구하지 않아도 명상을 하고 자신의 가피력과 지혜를 쓰면 그런 걸 가질수 있어요 결국엔 관음보살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릅니다 그때는 그녀의 도움을 청하는 대신 우리가 그녀가 되어서 똑같은 힘과 똑같은 신통력,똑같은 자비,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똑같은 사랑을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비가 없어서 갖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특히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수행하는 것인데,사람들에게 자비를 관하도록 가르치는 법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이렇게 앉아 눈을 감은 다음에 여러분의 오른쪽은 어떤 친구들이라고 또 여러분의 왼쪽은 어떤 적들이라고 상상하고,여러분의 앞쪽은 친척들이고 여러분의 뒷쪽은 죽은 이들이라고 상상합니다 정확히 똑같이 할 필요는 없어요 앞쪽과 뒷쪽,왼쪽과 오른쪽의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지요 문제 없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다른 중생들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좋은 인연이 있는 중생들과 도움이 되는 중생들 우리를 사랑하거나 우리와 싸우는 중생들 우리와 의견 차이가 있고 우릴 좋아하지 않는 이들을 말이지요 물론,그들 중 몇몇은 우리의 친척이고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온갖 중생을 상상하며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 선한 소망을 보냅니다

어느 정도 수행한 뒤 사랑이 많아질 겁니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법문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중생들은 다른 요구와 배경을 가지니까요 그들은 다른 이해수준 다른 필요를 갖습니다 하지만 그 법문을 평생 할 순 없다고 난 생각해요 우리는 내내 자비심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호흡에 집중할 수 없어요 또 우리는 뛰어다니며 평생 사람들의 해골만 볼 수도 없습니다

전에 산이 많은 숲에서 해골에 집중하는 법문을 수행하던 여승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범죄자 둘이 그녀의 절을 지나다가 도망갔습니다 경찰이 그들을 쫓다가 여승이 거기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이 물었습니다 『두 죄인이 여길 뛰어 가는 걸 보셨나요?』 그 스님은 한참 생각한 뒤에 답했어요 『아뇨,못 봤어요』 경찰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확실합니까? 정말 못 보셨나요?』 그 스님이 말했어요 『아뇨! 난 명상 중에 두 해골들이 뛰어서 가는 것을 봤어요』

그 당시,그녀는 이 법문 수행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를 종일 또는 평생 해골로 본다면,세상은 멋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해골 사이에서 살 수 없습니다 너무 지루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성공하면 나아가 다른 법문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게 더 좋지요

석가모니 부처가 시각화와 호흡 명상 해골 명상 육신의 불결한 것에 대한 명상을 포함한 많은 명상법을 가르쳤지만 그는 또한 완벽한 법문인 관음법문을 가르쳤습니다 가장 유명한 능엄경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귀를 내면으로 돌려 네 자신의 불성을 들어라』 『귀를 내면으로 돌려 네 불성을 들어라』자성을 들으라고 석가모니 부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들어야하죠? 왜 그게 들릴까요? 어떤 본성일까요? 그가 들으라고 했다면 분명 소리가 있습니다 듣는 건 듣는 거예요

그럼 왜 우리 본성엔 소리가 있을까요? 우리 자신의 본성은 소리가 아니지만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처음에는 소리도 빛도 아닙니다 그것은 평화롭고 고요할 뿐이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거친 분위기와 가까워지면 그것은 소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과 다른 종류의 소리지요 인간의 말로 그런 것을 묘사할 수는 없어서 우린 임시로 그것을 일종의 소리와 진동이라고 부릅니다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서,그것은 일종의 소리지만 진짜 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귀로 그걸 듣지 않으니까요 평범한 인간의 경험으로, 그것은 소리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말했어요 『내면으로 돌려 참 본성을 들어라』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뭘까요? 본래,우리는 외부의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의 귀는 외부의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외부 음악을 듣습니다 밖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떨어지지요 모든 것이 밖에서 옵니다,그래서 우린 대개 밖에 관심을 갖고 소리를 듣습니다 그럼 이제『내면으로 향해서 듣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우린 내면을 듣습니다 그래서『내면으로 향해서 듣는 것』이죠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뭘까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이 가슴이 아니라 본래 자아입니다 거기서 우리 육신의 자아가 온 곳이며 돌아갈 곳입니다 우리의 본래 자아가 우리의 진짜 본성이죠

예를 들어서 이 컵의 본래 자아는 플라스틱입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플라스틱으로 그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그 본성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의 원래 본성은 다릅니다 이 수건의 본래 자아는 무엇일까요? 면입니다 네,맞아요 그것이 빨갛고 녹색으로,검고 희게 염색됐든 간에 또 크던 작던 간에 그것은 면입니다 그것을 분해하면 다시 면이 될 것입니다 비슷하게 우리의 진짜 본성은 대 자비 대 평화 대 지혜입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있고 뭐든 가능합니다 추가 도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본성을 듣지 못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묻습니다 본래 우리는 누구일까 우린 어디서 왔을까?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의 답을 알고 싶다면 『우리 본성을 듣고자 내면으로 가야』하죠 내면의 진짜 본성을 더 많이 들을수록 더 많은 지혜가 개발되며 우리가 누군지 더 많이 이해하고,우리의 능력과 엄청난 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짜 본성을 듣고자 내면으로 향해야 하는 겁니다,언젠가 최상의 존재가 되어서 우리의 최고 지위를 알 때까지 말입니다 그 때를 불교 용어로 불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비슷하게,영어로 말하고 싶고 영어권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면 매일 조금씩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많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집에서 약간의 영어만 말할 수 있지요 『안녕하세요? 전 미스터 왕입니다 이것은 내 손입니다 이것은 꽃입니다』 몇몇 단어일 뿐이지만 그들은 이미 중국어가 아닌 영어처럼 들리죠 하지만 적어도 우린 영어를 좀 압니다 그런 뒤 더 많이 배워서 영어를 나중에 더 많이 안다면,우리는 영어권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과 같이 됩니다 우리는 영어책을 읽을 수 있고 영어권 사람들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부처나 석가모니 부처 노자,공자,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인이 되고자 한다면 과거의 스승들처럼 위대하게 되고 싶다면 그들이 했던 것과 같은 걸 배워야 합니다 그럼 그들과 소통할 이 언어를 쓸 수 있지요 우리가 더 많이 소통할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나아집니다 결국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되어서 그들에 대한 전부를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린 그들이 됩니다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나중에, 질문이 있으면 질문을 적어서 내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린 자신에게 왜 영적 수행이 필요한지 물어야 해요 매일 먹고 자고 일하면 충분하지 않나요? 왜 우리의 진짜 본성을 듣고자 내면으로 향해야 할까요? 그것은 단지 먹고 자고,일만 한다면 엄청난 능력의 낭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아닌 두 삶을 살 수 있어요 하나는 덧없고 제한된,고통과 근심으로 가득한 삶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롭고,강력하며 놀라운 삶입니다 네,우리 인간은 둘 다 살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우리는 인간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의 삶인 위대하고 무한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부처라면 감정이나 식욕을 잃지 않은 채로 여전히 인간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먹고,자고 물의 온도를 맛보거나 사탕의 단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모든 걸 알지요 여전히 인간임을 즐기며 속세의 과업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 없어요 여러분이 사업가라면 계속 여러분의 사업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은 부처가 됐다는 것 뿐이지요 부처면서 동시에 여러분은 사업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지요 직업이 두 개인 겁니다

내가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어떤 이들이 비밀 스파이란 걸 아나요? 난 들어봤어요 007영화를 보면 스파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단 걸 알 것입니다 그는 자국과 타국의 국가 기밀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는 택시 운전사처럼 또는 사업가처럼 보입니다 그는 사업하는 법을 압니다 그는 공장 같은 것을 열고 그의 수입이나 지출이 얼마나 될 지 계산할 수 있습니다 공장에서 할 일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경영자도 사장도 다 될수있죠 허나 그의 진짜 일은 더 중요한 것으로 자기 조국과 국민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 일은 더욱 중요하고 위대하며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권위를 줍니다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그를 존경하지요 장관들을 포함해 모두가 그를 존경해요 경찰은 감히 그를 체포하지 못하거나 어떻게 하지 못하죠 그는 어디든지 다닐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제한된 곳도 다 접근 가능한 암호가 있습니다 그는 남들이 못하는 놀라운 일들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국방 기밀도 많이 알고 있지요 일반인들이 모르는 비밀을 말입니다 그는 남들이 갈 수 없는 수많은 회의나 협의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성불한 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소위 최고의 지능과 지혜가 있고 여전히 세상에서 일을 계속 하면서 자신의 조국과 가족을 돌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더 공식적인 그의 다른 직업은 중생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는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서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가서 영혼을 천국에 데려올수 있죠 천국에 있는 영혼을 더 높은 불국토로 끌어 올릴 수 있고요 그건 그의 일이죠 허나 세속적 의무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존재는 큰 권한이 있어서 세속적인 쾌락이나 즐기고 매일 일이나 하면서 백년을 살다가 죽으면서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반인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인간 존재의 최상의 목적이 위대한 지혜를 얻고 깨닫는 인생을 사는 것이라 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압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운명에 굴복하여 소중한 인생 백년을 낭비하는 대신에요 많은 이들이 묻지요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게 고귀하거나 비천하게 운명지어졌다고요 그럼 영적인 수행이 무슨 소용인가요? 수행으로 달라지는게 뭐가 있습니까?』 난 많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난 이렇게 말했었죠 세속적인 의무를 다하면서 함께 다른 권리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단 위대한 지혜를 획득하고 내면의 보물을 발견하기만 하면 많은 일을 할수있죠 심지어 우리가 택시 기사라서 힘들게 살면서 하루하루 직접 생계를 번다고 해도 여전히 천백억 화신을 나투어서 남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천백억 화신과 막대한 영적 힘은 우리가 택시를 운전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가난하면서 동시에 고귀하고 막강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인도에 약 5백년 전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까비르라는 스승이 있었는데 불교도가 아니었어요 일단 사람이 성불하면 그가 어떤 종교에 속하는 지는 아무상관 없습니다,왜냐하면 우리의 불성이 똑같으니까요 카톨릭 신자의 불성은 불교 신자의 불성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만일 내면을 본다면 그들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불하거나 도를 이루고 최고의 등급을 이룬 후에도 그는 생계를 위해 계속 일합니다 그는 천을 짜는 일을 하면서 돈을 아주 조금씩 벌었습니다 하지만 가난했어도 그는 여전히 수많은 화신과 위대한 영적 힘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천국과 지옥을 여행할 수 있었고 인간과 다른 존재를 가르쳤습니다

사회적 지위는 초라했지만 내면의 등급과는 상관없었죠 그의 가난한 삶은 운명이나 정해진 업이었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위인 최고의 부처를 성취했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히 수행하기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부자든 가난하든 남자든 여자든,착하든 나쁘든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늘상 업장이나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어요? 인간은 계속 인간이고 부처들만 계속 부처일 테고 희망도 없겠지요 아뇨 희망이 있어요 희망이 있으니까요 석가모니부처는 고난을 겪었고 49년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삶을 바꾸기 위해 이 법문을 수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변할 수 있으니까요 법문은 효과가 있고 희망이 있어요 그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참으며 사람들에게 위대지고 믿을 수 없는 힘을 우리 내면에 감춰진 보물을 찾는 법을 가르치면서 돌아다녔지요

지혜의 말씀을 보고 계십니다
『궁극의 법문』 칭하이 무상사 강연
홍콩 1989년 7월 7일

희망이 있으니까요 석가모니부처는 고난을 겪었고 49년간이나 돌아다니면서 삶을 바꾸기 위해 이 법문을 수행하라고 말했지요 삶은 바뀔 수 있으니까요 법문은 효과가 있고 희망이 있어요 그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참으며 사람들에게 위대지고 믿을 수 없는 힘을 우리 내면에 감춰진 보물을 찾는 법을 가르치면서 돌아다녔지요

물론이 길은 호흡을 관하고 해골을 떠올리고 자비를 떠올리고 육신의 불순물을 떠올리는 것만큼 쉽지는 않아요 염불이나 경전 읽기 불상에 절하기 참회하기 산과 강에 절하고 기도하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통상적인 법문을 자유로이 수행할 수 있어요 그들은 어떤 계율도 요구하지 않아요 우리 목표가 높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목적은 작아요 단지 약간의 복과 약간의 마음의 평화와 약간의 지성과 더 적은 육체적 욕망과 약간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는 게 전부죠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본성으로 내면으로 돌아가 관음법문을 수행하고 가장 위대한 지혜를 발견하고 부처가 되기를 원하면 좀 더 힘들지요 그래서 대부분이 관음법문을 수행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들은 차라리 종교적 후원자가 되려고 하고 영적 수행을 불상에 절하고 산에 절하고 경전을 읽고 회개하고 호흡을 관찰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운동으로 만드는데 그것도 재미는 있습니다 자신을 계속 바쁘게 해서 허튼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좋아요 그러면 작은 만족을 줄 것입니다

나는 6,7년을 가르쳤지만 전에는 대중적으로 가르치지 않았어요 아주 은밀했고 아무도 그걸 몰랐어요 한 명씩 말로 했어요 그게 전부에요 나는 그것을 비밀로 간직했지만 더욱 더 제자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매 주 왔어요 마침내 내가 살던 곳은 너무 협소해졌어요 그들은 내게 말했어요 『스승님 사람들이 더 많이 오도록 더 큰 곳을 빌리게 해주세요』그래서 난 매주 그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 그들은 말했죠 『아주 큰 장소를 빌리기는 하지만 공공장소를 빌려서 다른 사람도 강연에 오게 해주세요』

나는 이 법문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그것이 일과가 되었죠 그래서 그냥 계속 가르쳤어요 그렇게 이 비밀의 법문이 대중에게 알려졌어요 모든 사람이 이 법문을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도덕기준과 계율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들은 전에 그것들을 몰랐어요 지금 그들을 가르치면 후에 그들은 갈등하고 나쁜 생각을 하고 악업을 만들 겁니다

예를 들면 불교의 많은 것이 비밀이었어요 예를 들면 재가자들은 출가자를 위한 계율을 읽으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왜지요? 그들은 이 계율을 지킬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이 그것을 읽는 것은 쓸모 없고 갈등하게 만들지요 그들이 계율을 알지만 지킬 수 없으면 고통스러울 겁니다 『석가모니부처는 내가 이런 저런 걸 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매일 그렇게 한다』 심한 죄책감이 들겠죠

여러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을 모를 때는 괜찮아요 이제 그것을 알지만 지킬 수 없으면 갈등을 겪을 겁니다 그래서 재가자들은 그것을 읽는 게 허용되지 않았어요 계율이 해로워서가 아니지요 우리가 어떤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이런 계율을 아는 건 우리의 마음의 평화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합니다 예컨대 그들은 물어요 『관음법문이 좋다면 왜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만 가르쳐주는가? 왜 모든 사람에게 교회나 길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지 않는가? 왜 책을 써서 공개해서 가르치지 않는가? 이게 사람들에게 더 이롭다면 왜 비밀로 하는가?』 이것은 아주 논리적인 질문이지만 많은 약초가 어른을 위한 거지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란 걸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어른에게 그 약을 준다 해도 그들의 나이와 몸무게에 맞춰서 적절히 줘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처방하면 안되지요 그것은 전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어떤 약초는 아이들에게 처방할 수 없어요 좋은 것이라고 해도 사람들에게 함부로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과 같아요 사람들에게 좋다고 해도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살 수 있어요 왜 의사가 그렇게 엄한지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그들이 엄한 게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걸 할 수 없으면 그걸 알면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어른이 결혼한 후에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과 같아요 어른에게는 아주 흔하고 정상적이지요 거기에 아무런 비밀이 없어요 해롭지 않아요 우리모두 이걸 알지만 기꺼이 아이들에게 이걸 알게 하나요? 아이들에게 그걸 가르칠 건가요? 아니요 안 그럴 겁니다 이건 아주 논리적이죠 아이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해로울 것입니다 그들은 그걸 다루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보통 법문을 수행하면 더 쉬울 거라고 설명했어요 그것을 비밀로 간직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사람에게 수 백 번 공개로 가르칠 수 있죠 이것이 소위 불교의『현교 혹은 열린 가르침』이고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불교에는 『밀교 혹은 비밀의 가르침』이 있어요

내가 가르치는 관음법문은 비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많은 계율이 있어요 그리 많지는 않아요 단지 5개 입니다 5개면 충분해요 아마 여러분에게 충분해요 예를 들면 채식입니다 영적인 비밀도 많이 있어요 예를 들면 30가지가 있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영적 수행에서 해로울 겁니다

진지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그걸 이해하거나 전혀 흥미가 없거나 전적으로 믿지 않고 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에 정말로 진지하지 않고 중생을 도우려고 부처가 되는 것에 정말로 진지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것은 여러분이 정말 흥미가 없고 이 계율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뜻해요 그저 멋대로 수행하면 그다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때로는 여러분 자신에게 해롭지요 그래서 이런 법문은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없고『비밀의 가르침』 이라고 불립니다

비밀의 가르침은 출가자의 계율과 입문과 내적인 전수를 포함합니다 그것은 입문할 때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적인 전수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갑자기 위대한 깨달음의 경험을 할 겁니다 그 날부터 우리는 더욱 더 깨닫게 되고 더욱 더 지혜가 있고 더욱 더 이해력이 생기고 더욱 더 편해지고 많은 다양한 것을 더욱 더 많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소위 『밀법』입니다

여러분이 그걸 적고 사람들이 그걸 읽어도 그 법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밀법』이지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가르치면 그 사람만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훔칠 수 없고 몰래 엿보고 나서 혼자 배우지 못합니다 내면으로 전수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법문이지요 우리 세상에서처럼 많은 것이 보이지요

예컨대 내가 영어를 가르치고 싶으면 그걸 적어서 ABC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안녕? 날씨가 좋다 날씨가 화창하다 당신은 아름답다』 우리는 그걸 적어서 크게 말할 수 있고 혹은 칠판에 적어서 남들이 그걸 베끼거나 테이프에 녹음해서 나중에 그것을 들을 수 있지요 그러면 그들은 매일 이렇게 공부하고 매일 연습할 수 있어요 언젠가 그들은 말하는 법을 알 겁니다 이것을『세속법』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불법』은 보이지 않는 법문이죠 칠판에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 속에 써 지지요 그걸 우리 지혜 속에 쓸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지혜의 스승이어야 합니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지혜를 통제할 수 있죠 그는 자신의 위대한 지혜를 최대한도로 쓸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는 우리의 지혜와 교감하는 능력을 가질 것이고 그걸 우리의 지혜 안에 쓰며 우리가 지혜를 열고 계발하게 도와 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아요 우린 그 또는 그녀를 『깨달은 스승』 또는 득도 한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천국,지옥, 불국토와 물질적인 세계를 갈 수 있어요 우린 그를『신성한 선생』또는 뭇 생명의 아버지라 부르죠 그는 석가모니 부처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석가모니는 세상을 떠난 뒤 부처가 되었으며 이 힘과 법통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수되었어요 그의 제자 마하가섭은 그 당시에 석가모니 부처처럼 도를 이루었죠 하지만 아난이나 다른 제자들도 부처와 같은 등급에 도달했는지는 모릅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이 힘을 그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등급은 부처처럼 높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다른 이에게 그 법문을 계속 가르칠 수 있었죠 마치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요 때때로 부모는 매우 유능하고 사업에서 성공적이어서 부모가 죽을 때 자신의 재산과 권리를 아들에게 물려 줍니다 그 아들이 그의 부모만큼은 유능하고 현명하지 못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부모가 그에게 권한을 주어서 그를 후계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사장이 됩니다

그의 밑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를 따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죠 그의 부모가 그를 위해 길을 열어 놓았기에 그가 자기 회사를 경영하는 게 매우 쉽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가 성불은 하지 못했어도 때로는 불력에 의지하거나 부처가 우리에게 그 힘을 전해줘서 우리도 진리를 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펴는 데 잘 하기 위해선 두 가지의 가르침을 배워야 해요 하나는 공개적인 가르침이고 다른 건 은밀한 가르침이죠 공개적인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펴는 건 많은 스승들이 강연하고 경전을 설명해줄 때와 같아요 사람들에게 공덕을 쌓도록 부처의 명호와 만트라를 외우게 하고 불상을 숭배하거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도록 가르칩니다 사람들이 도덕적이게 가르칩니다 이게 열린 가르침인데 이건 이해하기 매우 쉽고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이 도를 이루었다면 은밀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죠 가장 높은 등급에 이르지 못했다면 스승에게 허락을 받아 은밀한 가르침을 전해야 해요 이건 마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서 회사를 보살피는 것과 같아요 그들은 여러분에게 책임을 위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펴더라도 두 방법을 모르면 우린 하나를 놓치는 거예요 공개적인 가르침만을 알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은밀한 가르침 무형의 가르침 진정한 내면의 지혜를 모른다면 우린 절반 스승에 불과합니다

두 가지 유형의 스승이 있는데,은밀한 가르침을 아는 스승과 공개적인 가르침을 아는 스승이 있죠 은밀한 가르침만을 알고 공개적 가르침은 모른다면 이 역시 문제예요 왜죠? 그건 공개적 가르침이 세속적인 법과 지침을 언급하기 때문이에요 우린 많은 경전을 읽어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의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하는 법을 압니다 예를 들어 육조 혜능은 은밀한 가르침만을 알았고 공개적 가르침을 몰랐어요

또 다른 예로 스승 신수는 공개적 가르침은 알았지만 도를 이루진 못했기에 신수는 가장 높은 등급에 이르지 못했죠 그는 모든 경전을 설명할 수 있고 그 모두를 알았지만 은밀한 가르침을 전하는 허락을 얻지 못했어요 그 법통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기에 그의 스승이 했던 것과 같은 은밀한 가르침을 전할 수 없었어요

육조 혜능은 도를 이루었기에 가능했어요 그는 경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공개적 가르침을 몰랐어요 그는 자연적으로 도를 이루었죠 우리가 경전을 읽지 않는다 해도 도를 이루는 건 더 쉽습니다 우린 더 단순하고 순수하니까요 하지만 도를 이룬 후에 여전히 경전을 읽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연구해야 해요 우린 다른 이들을 구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런데 부처가 된 사람은 공개적 가르침을 모르고 경전을 읽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그에게 경전을 읽으면서 질문을 하면 대답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공개적 가르침만 알고 은밀한 가르침을 모른다면 가끔은 공개적 가르침조차도 이해할 수 없어요 읽기는 하지만 이해를 못하는 거죠 그러므로 은밀한 가르침, 이 무형의 방법이 더 중요합니다

도를 이루는 게 더 중요해요 이건 어떤 언어로도 묘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어요 석가모니 부처처럼 지혜를 갖고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게 더 중요해요 둘 다 안다면 최고죠 둘 다 아는 건 매우 쉬워요 공개적 가르침을 아는 건 더 쉽죠 우린 책과 경전을 읽을 수 있어요 경전을 사서 집에서 그걸 공부할 수 있죠 우린 천천히 그걸 이해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은밀한 가르침을 알고 싶으면 가서 은밀한 가르침을 이미 알고 있는 선생 경험 있는 스승을 찾아야 해요 마치 경험 있는 영어 선생에게 가듯 이요

그가 우리를 가르치면 둘 다 알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대개 공개적 가르침을 이미 압니다 요즘은 경전을 찾는 게 매우 쉬우니까요 많은 이들이 경전과 책을 인쇄하여 다른 이에게 무료로 주거나 모든 절이 대중에게 개방적이고 무료인 도서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걸 공부하는 게 매우 쉽죠 따라서 오늘날 공개적 가르침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아요

옛날엔 사람들이 공개적 가르침에 접근조차 불가능 했죠 그래서 사람들이 경을 외운 거예요 어떤 이는 먼 곳으로 가서 부처와 함께 공부하곤 했어요 그는 부처가 말한 걸 기록해서 집에 돌아온 후 다른 이들에게 그걸 읽어 주었을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걸 암기했을 거고요 그들은 그걸 함께 암송해서 잊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경을 암송하는 전통이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사람들이 아직 이 전통을 지키는 거죠 이건 매우 아름다운 전통이에요 우린 고귀한 가르침을 배워서 어둡거나 저급한 생각을 갖지 않을 겁니다

경을 외는 건 잡담보단 더 나으니 이건 매우 아름다운 전통이에요 또한 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 갈 수 없어서 문맹이었어요 그래서 남들이 경을 대신 읽어 주어서 한 문장씩 그걸 외고 기억해야 했어요 매일 이처럼 읽고 외웁니다 그게 옛 전통이에요 그래서 옛날엔 공개적 가르침을 알게 되는 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경전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죠 그러면 그 사람이 시간이 있고 자진해서 하고 싶다면 경전을 읽어 주곤 했어요 그들이 경을 암기할 수 있을 때까지요 이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공개적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선생과 함께 공부하고 싶었더라도 그에게 절하고 그를 존경하며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공양을 해야 했어요 그래야만 경을 읽어 주었을 거고 안 그럼 가르치지 않았겠죠 해서 이 전통이 오늘날 까지 지켜지는 거예요 오늘날 성직자에게 가서 그와 얘기하거나 라마승을 방문해서 경을 읽고 설명해주길 청하거나 절에 가서 경을 설명해주거나 경을 함께 암송하길 스승에게 청할 때에는 공개적 가르침을 펴는 스승에게 깊은 존경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 역시 매우 훌륭한 전통이에요

남들을 더 많이 존경하면 할수록 에고가 적어지며 오만하지 않게 됩니다 에고가 적을수록 더욱 더 고상하고 현명하며 자유로워지죠 왜냐하면 우린 이 에고와 우릴 묶는 이 작은 자아와 이 민감한 심성 또는 우릴 해치는 열등감이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게 매우 아름다운 전통이에요 모든 전통이 매우 아름답지만 완전함을 달성하고 싶으면 한 가지만 공부해선 안됩니다 대신 공개적이고 은밀한 가르침 둘 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게 완전할 거예요

내 말은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 가르침을 펴고 있고 많은 절들이 이 고귀한 일을 하고 있어서 그걸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비밀의 가르침을 가르칠 뿐이에요 그건 묘사할 수 없는 도이며 그 방법과 내면의 전달은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아요 난 여러분이 깨닫도록 도와 자신의 진정한 지혜를 깨닫고 자신이 진정 속해있는 곳으로 가고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디든 가서 강연을 하는 진짜 이유는 다른 절반, 잃어버린 절반을 가르치고 내면의 전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승님 우리가 깨달은 뒤 퇴보하기도 하나요?

가끔은 그래요 그리고 가끔은 그렇지 않죠 작은 깨달음만 얻었고 불퇴보살 혹은 아라한이라 불리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으면 떨어집니다 불교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할게요 아라한은 다신 지구로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말해요 불퇴보살은 성불까지 계속 진보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아라한은 그의 경지에 계속 머물며 부처가 되지 않을 수도 있죠

불퇴보살은 퇴보하지 않아요 만약 우리가 적어도 아라한의 경지나 불퇴보살의 경지에 이른다면 퇴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경지에 도달 못하면 퇴보할 수 있지요 하지만 아주 위험하죠 그렇지만 스승에게 충실하고 그 혹은 그녀에게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우리가 아라한이나 불퇴보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해도 떨어지거나 다시 평범한 사람이 되진 않을 거에요 우리는 계속해서 죽은 다음에도 진보할 거에요

내가 기독교의 주님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불교의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겁니다 이것이 나의 믿음과 상충하는 건가요?

아뇨 당신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명상을 더하는 거죠 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관음법문은 불교의 수행법도 아닙니다 우주의 수행법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관음법문을 수행했어요 여러분이 돌아가서 성경을 신중하게 읽는다면 알 거에요 그러나 관음법문을 수행한 후에야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요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성경을 읽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관음법문과 연결된 부분들을 놓칩니다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어떤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요?

성경에 관음법문과 관련된 내용이 어느 부분에 있단 걸 설명해주는 내 책들을 읽을 수 있어요 수행을 계속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믿으세요 괜찮습니다 난 여러분에게 부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아요 오직 관음법문을 수행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스스로 이해하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인지 누가 부처인지 알게 되며 그것 또한 재미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알아야 하는건 아니죠 부처도 조금은 알 수 있어요 다치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 부처, 노자와 공자 중 누가 더 훌륭한가요? 누구의 가르침이 더 나은가요?

당신의 종교가 가장 좋아요 그리고 당신의 종교의 지도자가 가장 훌륭합니다 당신의 종교의 지도자가 가장 높고 당신의 종교가 최고 입니다 그보다 나은 건 없어요 만약 모두가 진정한 천주교인이 되었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평화로워졌겠죠 만약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가 말한 대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했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평화로워졌을 겁니다

그러나 우린 좋은 천주교인이나 불교신자 가 아니었지요 여태 어떤 종교가 더 좋은지 계속해서 얘길 합니다 우리의 좋지 않은 거죠 그렇지 않으면 모든 종교가 다 좋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뭘 가르치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뭘 가르치죠?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 너의 나라를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자비와 동정심을 가져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남을 험담하지 말라 허튼 소리를 하지 말라 남을 비난하지 말라 이건 불교의 계율이 아닌가요? 그들은 같습니다

무엇이 가피력인가요? 축복음식을 먹으면 어떤 효과가 있나요?

가피력이란 이런 것과 같아요 높이 깨달은 존재의 에너지 영역은 넓고 막대합니다 그리고 그의 힘은 매우 강해서 그게 무엇이든 그가 만지는 건 거기에 남겨진 그의 고귀한 에너지를 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축복음식을 먹었을 때 좀 더 고귀해지고 좀 더 깨닫게 되며 우리의 삶은 더욱 축복받게 됩니다 우리의 축복의 힘으로 인해 우리가 겪게 될 재앙이 좀 덜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수행할 수 없죠 그래서 가끔 부처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부처와 얘기를 나누고 가까이 가서 부처를 만져보려 오는 겁니다 부처는 우리에게 어떤 등급으로 작용해요 백단향처럼 말입니다 숲에 백단향 나무가 오직 한 그루만 있어도 그 근처의 모든 숲에서 백단향 나무 향기가 날 거예요 어떤 종류의 나무든지 상관없이 백단향 나무의 영향을 받아서 매우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겁니다 이처럼 크게 깨달은 존재는 높은 덕과 매우 고귀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의 이상은 이 세상 너머에 있으며 그의 힘은 삼계를 초월해 있어요 우리가 그와 접촉하게 되면 조금은 영향을 받게 될 겁니다

마치 자석과 같이 바늘을 끌어당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런 다음 그 바늘도 자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바늘을 끌어당기게 되죠 그럼 커다란 바늘 다발을 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영적 수행자의 축복을 받게 되면 약간의 복과 고귀한 성품을 갖게 될 겁니다

누군가 호랑이로 태어나면 다른 동물을 먹으려고 죽여야 해요 업이 더 무거워져서 구원받을 수 없게 되는 겁니까? 그도 구해질 수 있죠 하지만 더 어렵고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은 나쁜 업장에 때문에 호랑이에 의해 죽었음을 명심하세요 호랑이 탓만은 아니죠 그래서 어느 날 서로의 업을 갚고 난 후에 그들은 평등해져서 호랑이는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아마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호랑이처럼 아주 잔인한 겁니다 방금 호랑이였다가 환생했을 거예요

부처는 무한한 신통을 가졌음에도 어째서 독이든 버섯을 실수로 먹고 죽게 된 겁니까?

부처는 실수로 먹지 않았어요 진작부터 알고 있었죠 그걸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서 제자들이 먹지 못하게 하고n자기만 먹었어요 그는 먹기 전에 이미 열반에 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석 달 뒤에 죽었어요,그렇죠? 그는 먹기 전에 분명히 말했어요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돌아와 유언을 듣도록 불렀어요 그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 먹은 겁니다 독을 먹지 않았어도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역시 죽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는 그 사람의 공양을 받아서 그 사람이 복을 받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버섯을 먹었던 겁니다 그가 먹어야 해서 먹은 게 아닙니다 그가 먹든 안 먹든 곧 죽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에 먹었다고 달라질게 없죠 예를 들면 밀라레빠는 티베트의 큰 스승이었지요 그는 독을 마시기 전에 이미 알았어요 아주 분명히 말했죠 하지만 시간이 다 돼서 마셔야 한다고 했어요 그를 독살하려는 사람에게 그의 힘을 알게 해서 회개할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마신 겁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박히기 전에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분명히 밝혀서 모두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됐기 때문에 해야할 것을 한 것 뿐입니다 피할 수 없었어요

『선』이 뭡니까?

『선』은 언어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물어도 설명을 못합니다 『선』이 뭔지 알고 싶다면 관음법문을 수행하세요

스승님 저는 지금 채식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평생 동안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섭니다 만일 제가 마침내 채식주의자가 된 다음 포모사(대만)을 찾아가서 관음법문을 배워도 됩니까?

좋아요 먼저 해보세요 좋습니다!정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마음을 먹는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채식이 이로운 것과 육식이 해로운 것은 물론 동물에게 해롭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육식을 못할 겁니다

스승님『보리』 가 뭐지요?

불교에서『보리』란 『보리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보리』는 범어로 지혜나 현명한 지식 또는 지력을 뜻합니다 보리심을 갖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수행을 하겠다고 서원한다는 뜻이죠 관음 법문을 수행하듯이요 이런『보리』와 지혜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내기로 서원하는 겁니다 보리심을 갖는 사람은 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며 정말로 수행을 하고 지혜를 얻고 부처가 되어서 중생을 구제하며 생사윤회를 초월 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곧바로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채식을 시작하고 우주의 신비를 공부하며 깨달은 스승을 찾으면 부처가 되는 비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깨달은 스승을 찾아가서 스승의 계율과 수행법을 배웁니다 그것이 보리이죠

지혜의 말씀을 보고 계십니다
『궁극의 법문』 칭하이 무상사 강연
홍콩 1989년 7월 7일

저는 불교 신자입니다 종종 기독교인들과 토론을 하곤 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기독교인들은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고 믿는겁니다 무엇이 진실인가요?

유일신이란 없습니다 사실 신은 없으며 어떤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창조의 힘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이 힘에 의해 창조됐지요 주위를 둘러 보면 많은 걸 볼 수 있죠 그래서 아무도 창조한 사람이 없다거나 창조의 힘이 없다고 한다면 참지 못할 겁니다 그런 텅빈 감정을 견디지 못할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우주를 만든 어떤 창조의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창조의 힘은 실은 사람이 아니라 그 보다는 자연적인 변화의 힘입니다 그 힘이 너무 완벽해서 『절대자』또는 『무한 존재』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둘 다 같은 뜻이죠 석가모니 부처는 신을 언급하지 않았어요 『무상』이나 『능가할 수 없는 완벽히 깨달음』 이라고만 했지요 그 힘과 같은 거에요 온 우주가 『능가할 수 없는 완벽한 깨달음』에 의해 창조됐습니다 이 힘이 없이 석가모니 부처가 어디서 왔겠어요? 그가 스스로 생겼을까요? 그런 지고한 힘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 힘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 없어요 이 힘은 우주의 근원입니다 이 힘이 우주를 창조하고 이 힘이 우주를 파괴하며 이 힘이 우주를 키우고 그런 다음 재창조합니다 이 힘을 우리가 『음양』이라고 하죠 그 음과 양이 번갈아 가며 우주를 창조합니다 만일 창조라거나 그런 음양이 없다면 우주는 재미없이 단조로웠을 겁니다 변화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똑 같거나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이 지루할 겁니다 이 세상은 또한 진동으로 창조됐고 그 진동이 우리의 본래 자아를 창조했죠 그래서 불교에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지요 수행을 시작하면 우리가 신이란 걸 알게 됩니다 결국 그걸 깨달을 겁니다 일체 유심조라고요

스승님,병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사를 찾아가서 약을 먹고 쉬거나 부처,신 또는 예수에게 기도하세요

높은 경지에 오른 수행자는 부처나 예수를 볼 수 있나요?

네,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높은 경지가 아닙니다 예수나 부처를 보는 건 최고의 경지가아닙니다 최고의 경지는 자신이 부처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나의 많은 제자들이 예수나 부처를 봤죠 많은 제자들이요 불교도인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기독교도인 사람들은 부처를 봅니다 둘 다 재미있죠 그러면 차이가 없다는걸 알게 됩니다 불교신자가 석가모니 부처를 봤다면 놀랄 게 없지만 내가 예수를 보게하면 모두가 하나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부처나 예수의 비전을 보는 것에 대해 좀 설명을 해 보죠 우리 수행자들이 예수나 부처 또는 노자,공자, 모하메드와 같은 과거 스승들을 보는 것은 그들의『일터』를 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가 과거에 스승이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이 세상을 떠난 다음 다른 세상의 존재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러 갔죠 그 세상은 우리 보다 더 좋으며 사람들도 가르치기 쉽고 외모도 아름답고 순종도 잘하고 훨씬 도덕적입니다

그 스승들은 여기서 할 일을 마치면 진급을 합니다 임무를 끝내면 더 높은 경지로 승격되어서 가르침을 더 잘 알아듣는 존재들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명상을 할때나 반드시 명상이 아니어도 수행을 시작해서 걸을 때나 쉴 때,앉을 때, 잠잘 때 등 언제라도 열심히 수행하면 그런 스승들을 볼 수 있습니다 걷거나 앉거나 자거나 쉬는 동안에도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네가지 상태가 모두 같아요 모두 다 명상하는데 차이가 없어요 잠자는 동안에도 깨어있는 기분이죠 명상하는 동안에도 먹는 것과 같고 먹는 동안에 명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상태가 똑같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더 높은 경지의 내면의 비전을 볼 수 있어요 내면의 지혜가 높은 경지에 도달해서 예수나 석가모니 부처 또는 노자나 모하메드를 봤다면 그 비전이 우리의 지혜가 어떤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말해줍니다 또한 그 스승들이 어떤 경지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죠 예컨대 어떤 스승이 이 세상 보다 약간 더 높고 아스트랄계라고 불리는 일 세계에서 살도록 지명됐거나 우리의 의식이 아스트랄계 수준이거나 우리의 지혜가 아스트랄계 높이라면 그런 스승을 만날 겁니다 우리가 본 스승이 높은 경지에 지명이 되고 우리의 지혜도 2세계를 이해할 만큼 높아서 그런 경지로 올라갈 수 있다면 그런 스승을 만날 겁니다 별거 아니에요

입문이 뭡니까?

지혜를 여는 겁니다 말이 없이 법맥을 전하고 비밀의 가르침, 『선』을 전하는 겁니다 나는 입문을 줄때 언어를 쓰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줍니다 적절한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마음은 가장 중요하며 가장 잘 이해합니다 감정으로 가득하지요 그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심전심으로 그것을 전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는 그것을 여러분과 관계시키는 방법이죠 그래야 말할 뭔가가 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그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난 진정한 가르침인 법맥 또는 지혜를 전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럼 여러분 자신의 지혜를 열 수 있고 불성을 열어서 내면의 불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난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의 무형의 감정과 무형의 이해 이심전심을 대표하죠 마음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지혜를 대표합니다

다른 종교를 따라도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은 부처를 모르지만 예수를 믿습니다 그럼 그들이 최후에 부처가 될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부처가 뭡니까? 석가모니가 아니에요 『부다』는 범어이며 중국어로『포투』지요 우주의 비밀을 완전히 아는 깨달은 스승을 뜻합니다 이 스승을 부처라고 부르지요 누구든 우주의 비밀을 알거나,완전히 깨달으면,또는 완전한 지혜를 가졌다면, 부처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인데 완전한 지혜를 얻었다면,여러분은 부처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부처가 모든 중생을 구하는데 어떻게 그가 모두를 구하냐고 묻습니다

우린 이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누구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번갈아가며 서로를 죽이지요 오늘 그를 죽이면 내일 당신이 죽겠지요 이번 생에 그를 죽이면 다음 생에 그가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위대한 영적 수행자들이 여기 와서 살생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말라에는 채식이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간접적으로 죽일 수도 없으니까요

매일,스스로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우릴 위해 수많은 동물을 죽이니 그 살생 업장이 어디로 가겠어요? 그것은 슬프고 화난 에너지,잔인한 에너지가 되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에너지도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따라서 이 에너지가 수많은 재난과 슬픈 상황들,더 많은 살생의 원인이 됩니다 내가 비유해볼게요 여러분의 배우자와 싸우고 나서 30분 뒤에 싸움을 멈췄다고 합시다 싸우는 행위만을 그만뒀을 뿐 여러분의 마음은 아직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예를 들어 제 삼자인 여러분의 어머니가 왔습니다 그녀는 여러분 둘이 싸웠다는 것을 전혀 모르지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운이며 바로 그것을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훨씬 더 강력한 에너지인 살생의 에너지가 있죠 너무 끔찍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매일 수많은 중생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도 그런 잔인한 기운을 갚아야 해요

난 누구를 비난할 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내 친구에요 친절한 이들도 내 친구이고 나쁜 이들도 그렇지요 그들 모두가 무지하며 그들은 이 세상과 우주의 법칙을 어기고 잘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응보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모두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그렇죠? 모두가 부처를 믿지는 않아요 부처는 모든 중생을 구하고 싶어하지만 중생들은 자신들을 구하기를 원하지 않죠,그래서 아무것도 못 되지요

여러분이 부모인데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말해도,그는 안하죠 대신에 그는 도박을 하러 갑니다 그는 자신과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때론 부모가 자녀의 개성을 바꿀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선행을 하도록 그를 가르치나,그는 고의로 악행을 합니다 따라서,때때로 여러분은 덕 있고 평판 좋은 부모에게 도둑질과 강도짓 하는 자녀가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자신과 부모의 명성을 더럽힙니다 그들은 모든 걸 합니다 그들 모두가 같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 스스로를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구할 수 없어요 부처에게 모든 중생을 구할 힘이 정말 있다면,그는 이 세상에 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천국에 머물며 어떤 만트라를 외워서 여기 전 세상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지 못했어요 왜 못했을까요? 부처가 사람들을 강요할 수 없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나쁜 짓을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을 좋아해서 떠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가 와서 고생을 했고 예수가 와서 그렇게 힘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부처나 깨달은 스승들이 여기서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돌아다니며 말했어요,『고향에 가고 싶다면,내가 데려갈게요』 고향으로 가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그들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원치 않으면 스승은 그들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을 견디며 좋거나 나쁜 것들,축복이나 나쁜 업장(응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린 다른 모두들처럼 함께 박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책임을 나눠야 하지요 아무도 혼자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그 책임을 일부 나눕니다 우리 역시 이런 자장에 공헌했기에,이런 일들이 생기고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나 악행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볼게요 예를 들어,여러분은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가난한』소녀들의 포스터를 봅니다 그렇지요? 전에,그 남자는 나쁜 생각을 안했거나 적어도 많이 안했어요 우리 아들들은 그리 생각을 많이 안했지만 그런 포스터를 봤거나 그런 영화를 봤다면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런 뒤에 나쁜 짓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아들들의 잘못만은 아니에요 이것은 전부 그 사회의 잘못입니다 그 사회와 그런 영화 때문이지요,맞죠? 또는,그게 이렇지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좋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 가정에는 돈이 없어서 호화로운 옷과 자동차를 살 수가 없습니다,그럼 우린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훔치기 시작하지요 그럼 경찰이 우리를 체포해 비난합니다 그렇지요? 그런 상황을 만들도록 도운 것은 우리의 환경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책임을 나눠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한가지 선택만 있지요 탈출입니다 우린 다시 이런 기운에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만일 돌아온다면 사람들을 구할 겁니다

우리에겐 그런 살생의 기운이 없을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구원자의 자장을 갖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수행을 해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중생을 가엾게 여기거나 고귀한 일을 해야 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가 창조해온 부정적인 자장이나 영향을 배상해야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고쳐야 합니다

영적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적 수행은 우리의 말과 행동,생각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 좋은 불자나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죠 그래서 살생과 도둑질 간통,도박,음주 등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격히 계율을 지킵니다 이것이 첫걸음이지요 다음 단계는 자선을 행하고 사람들을 도우며,덕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경전을 공부하고 마음을 정화하며 명상법을 배우거나 신 또는 부처에게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경전을 암송하고 부처를 숭배하며 경전을 연구해서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을 더욱 정화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적 수행은 관음법문을 수행해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이 최고의 성과입니다 이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세례가 불성을 보도록 이끄는 방법과 유사합니까?

세례하는 동안 신의 빛을 보거나 예수가 세례 받았을 때처럼 흰 빛을 여러분이 본다면 하얀 비둘기 같은 영적인 빛을 본다면 그럼 마음을 정화하고 불성을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머리 위로 물만 끼얹고 아무것도 안 봤다면 이것은 마음을 정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관계를 삼가해야 할까요? 티벳 불교는 커플이 영적 수행을 함께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옳습니까?

영적인 수행을 하면서 성관계를 삼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줄여야 합니다 그것을 관둬야 한다면 누가 수행하겠어요? 우리 대부분이 여전히 가족과 함께 삽니다 시간을 가지고 수행하세요 괜찮아요 최선을 다해서 줄이기만 하세요 성불할 때까지요 티벳 불교에서는 부부들에게 함께 수행하라 가르칩니다 스승들도 그들 둘 다 영적 수행을 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부부가 수행하면 더 편리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면서 협력하니까요 용기를 북돋워주고 서로 지지해줘서 그렇게 많이 서로를 오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싶은데 누가 채식을 한다면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수행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나중에 부부가 천천히 육체 관계를 줄여나가면 됩니다 부부가 함께 수행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잘못 수행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번 생에 수행해서 위대한 지혜와 해탈을 얻는다면 전생의 안 좋은 업장들을 지울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영적 수행의 목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번 생에 우리는 전생에 지었던 악업을 다시 갚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악업(응보)를 이번 생에 다시 갚을 수 있어요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말입니다

아직 창고에 좀 남아있다면 우리의 영적 공덕과 스승의 축복으로 그걸 태워버리거나 바다에 던져 버려서 다시 돌아올 구실을 없앨 것입니다 네,할 수 있지만 정업을 바꿀 순 없습니다 가난이 운명이면 가난할 것입니다 부자가 운명이면 부유할 것이고요 조금밖에는 바꿀 수 없습니다 이를 테면 나쁜 업장의 규모를 좀 줄이는 거지요 작은 업장은 없애버리거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신 꿈에서 일어나게 합니다 만일 차사고가 일어날 운명이라면 꿈에서 사고가 나는 것으로 업장을 치루면 됩니다 하지만 완전히 바꿀 수는 없습니다

윤회가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증명할 필요 없어요 뭣 때문에요? 증명하고 싶다면 영적인 수행이나 관음법문을 수행하세요 두 번째 세계에 도달하면 자신이 얼마나 윤회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경지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경지를 초월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과거 현재 미래를 봅니다 이건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영혼이 윤회한 거라 말하는데요, 영혼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면 왜 점점 더 많은 인간이 생깁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영혼이 정해져있다면 석가모니 부처는 내려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는 천상의 존재니까요 어떻게 왔겠어요? 영혼은 정해진 게 아닙니다,인간은 늘 인간이 아닙니다 이따금 동물들이나 아귀들이 올라와 인간이 됩니다 어떨 땐 천사가 내려와 인간이 되고요 많은 존재들이 인간이 됩니다 인간만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죠 그래서 인간들이 더 많아지는 겁니다

영적 수행자들은 아주 드문데다가 해탈하거나 부처가 되는 경우는 더욱 드뭅니다 해탈하는 사람도 적은데 성불하는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해탈하는 것은 성불하는 것과 다릅니다 해탈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성불하는 것은 보다 어렵습니다 부처는 해탈했으며 대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탈한 영혼들이 모두 부처가 되는 건 아닙니다 부처의 힘으로 해탈할 수도 있고 아라한(성인)이 되거나 아라한이 못되기도 합니다 그가 깨달은 스승을 만났을 경우에는요

예를 들어 우리가 일정기간 수행을 했는데 아라한(성인)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돌아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린 위대한 스승이 있기 때문에 중간 차원에 우리를 데려다 놓고 그가 가르쳐줘서 다시 이 세상에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가 우릴 보호하고 보증해주며 우릴 가르쳐서 우리는 계속 고양될 것입니다

만일 전쟁이 나면 영적 수행자도 정의의 편에 서서 싸워도 될까요?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없을 것 같군요 여러분은 법을 따라야만 할 겁니다 전쟁이 있으면 그 법을 따를 거에요 우리가 군대에 갈 필요가 있다면요

그가 회의장에서 스승님의 강연을 처음 들었을 때 입문을 하고 싶었지만 채식하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그는 완전 채식을 하면 가족 문제가 약간 생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반 채식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나요?

그는 반쪽 채식을 할 수 있고 이런『반쪽』법문을 수행할 수 있어요 그런 것이 많아요 경전암송이나 부처의 이름 암송 또는 참회 또는 호흡수련이나 해골을 떠올리는 것 등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유령과 신이 있나요?

인간도 다 돌볼 수 없는데 왜 우리가 유령과 신을 걱정해야 하나요? 예 정말 있어요 무서워요? 아닌가요? 나한테 몇 명 보게 해달라는 건가요?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큰 복이 있으면 감히 우리한테 나타나지 않아요 그들은 추하거나 어떤 것은 추해서 무례할 겁니다 우리가 공덕이 있으면 그들을 안 볼 겁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나타날 힘이 없어요

우리 호법이 그들을 막거나 쫓아 버릴 겁니다 귀신을 보는 건 쉽지 않아요 복이 많지 않은 사람만 볼 수 있어요

제가 명상이나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것을 제 가족이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요?

천천히 하세요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내 책이나 내 테이프를 듣게 해주세요 가족을 더욱 더 사랑하세요 하지만 당신도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매 생애마다 가족이 있었으니까요 손오공처럼 불쑥 그냥 태어난 적은 없었어요 이 생에서 가족의 방해를 받는다면 다음 생에서도 방해를 받을 겁니다 그러니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지만 결심을 확고히 하세요 자신만이 구할 수 있죠 우리는 우리자신만을 구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우리가 관음법문을 수행하면 5,6,7대 조상이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도를 얻으면 9대가 더 높은 곳으로 천도된다고는 말을 우리는 들었어요 맞지요? 9대가 천도될 것입니다 그걸 들어 봤나요? 정말 그래요 그래서 영적으로 수행하면 우리는 부모님께 더 좋은 자녀가 되고 우리 조상들과 부모님과 미래의 친척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5,6,7대 혹은 8대가 모두 천도될 것입니다 말해 주세요

스승님 우리는 업의 법칙을 만들어요 언제 그걸 만들지요? 우리가 그걸 만들 때 우리는 누구지요? 우리는 지금 이 물질계에 있어요 (예) 우리가 업을 만드는 때

그 때 우리는 누군가? 우리는 업을 지었는데 우리가 항상 인간인 때는 아니었지요 때로는 동물일 때 업을 만듭니다

업의 법칙(응보)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예) 다음 생에 아마 우리 중 누가 동물의 몸으로 함정에 걸리겠지만 법칙은 이미 거기 있었어요 언제 그걸 만들까요?

우리가 이 업(응보)의 세상에 내려올 때요 예를 들면 이제 우리는 자유세상에 있어서 자유롭게 많은 일을 합니다 차를 소유한다거나 TV를 소유하거나 농장을 소유하거나 집을 소유하거나 문제가 없지요 당신이 별로 자유롭지 않은 나라에 간다면 차를 소유하면 죄가 됩니다 텔레비전을 소유하면 일종의 법률위반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한 이 법칙에 따르면 많은 실수를 하지요 우리가 거기 올라가면 안 그럴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멈추는 최선의 길은 법칙이 없는 데 가는 거지요

처음에 우리가 지고에 있을 때를 뜻하나요? (예) 우리가 지고에 있다면 왜 우리가 떨어졌을까요?

우리는 지고한 자에서 왔지만 우리는 지고한 자가 아니었어요 지난 강연에서 난 이미 설명했어요 우리는 지고한 자에서 왔지만 일종의 지고의 자의 찌꺼기였어요 그래서 여기 내려왔고 우리가 도움이 되고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자신을 정화해야 해요

누가 지고한 자이죠?

아무도아니면서 모두죠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고 난 밤중까지 답변할 수 있지만 여러분은 이해 못할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혼자서, 자신의 지혜로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으로 알아야 해요 내가 말해주면 더욱 더 오해할 겁니다 그러니 더 좋은 건 관음법문을 수행하고 지혜를 얻어 가장 높은 곳에 가서 거기에 누가 있는 지 아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나 역시 고마워요

나도 그들에게 질문 했었는데 이 법문을 수행한 후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죠 모든 것에 답변을 얻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아니고 최고의 이해력과 최고 수준의 지혜로 답변을 얻습니다 또한 이 최고의 지혜를 최저의 우리 세상으로 가져왔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쓰레기죠 예를 들어 우리가 왕을 데려와 우리 집에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왕이 되는 게 어떤 기분이고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면 그가 우리 집에 있을 때 그는 더 이상 왕처럼 생기지 않지요 그는 설거지를 하고 여러분과 함께 먹고 얘기하면『왕이, 이런가?』생각하겠죠 그가 왕이면 자신의 자리에 있어야 해요

또한 여러분이 그를 알고 싶으면 왕궁에 가서 매일 그의 일을 함께 하면서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봐야 해요 그러면 그를 여러분 집에 데려와서 매일 그를 지켜보지 않고도 진정 그를 압니다 감사합니다 난 여러분에게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마음은 높은 지혜의 갈망으로 가득한 걸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 겁니다 또한 질문해줘서 기쁘지만 제한되고 매우 빈약한 언어로 인해 기쁘지 않으며 가끔 여러분과 나의 절망을 느낍니다

내가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을 바로 여러분에게 전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가 가진 평화와 자유를 여러분에게 바로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주는 게 아녜요 여러분이 노력해야죠 모두가 최고의 지혜를 위해 노력해야 해요 아무도 누굴 못 도와요 그래서 부처가 살아 있었을 때 길을 보여주는 것 외엔 아무도 도울 수 없었죠 그 다음엔 모든 이가 스스로 노력해야 해요

부처는 모두에게 자신이 깨달았던 모든 걸 말해줄 수 없어요 난『여러분의 갈망하는 마음에 진정 동감해요』 라고 말했죠 여러분은 높은 수준의 질문을 많이 했어요 높은 수준의 지혜를 알고 싶어 했으니까요 난 여러분을 동정하며 이런 것들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유감이에요 답변을 듣고 싶은 여러분의 고통과 갈망 절망을 압니다

나도 과거에 똑같이 느꼈어요 이해하기 전에는요 나 역시 절망했고 괴로웠어요 지금은 이해했지만 표현할 수 없어서 많은 절망감과 고통까지도 느낍니다 하지만 이건 여러분을 동정하는 고통이에요 내 고통은 아녜요 여러분에게 내가 이해하는 모든 걸 주고 싶어요 내가 느끼는 내면의 자유를 보여주고 싶고 여러분도 자유를 느끼게 하거나 내가 이해하는 모든 걸 주고 싶어요 하지만 난 이렇게 할 수 없어요 모두가 이걸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가 됐는데도 다른 이들은 여전히 스스로 노력해야 했던 거예요 모두가 그처럼 부처가 될 수 있는 건 아녜요 어떤 이는 성불했어요 그의 열명의 수제자 중 하나인 마하가섭처럼요 다른 이들은 아라한 (성인)이나 수다원 같은 다른 천신 또는 보살 등이 되었죠

어느 날 석가모니가 숲에 있는 동안 마른 잎을 한 손 가득 짚어 들고 아난과 다른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이게 많으냐?』 제자들이 말했어요 『많지 않습니다』 석가모니가 말했죠 『내가 이만큼만 너희에게 가르쳤다』 내가 아는 건 숲에 있는 모든 잎만큼 많지만 너희에게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없구나』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선생과 함께 정확한 법문을 배우면 숲에 있는 모든 잎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 아무도 우리에게 줄 수 없었던걸 얻지요 그들이 아마 우리에게 조금은 줄 수 있어요 아무도 우릴 대신해 부처가 될 수 없어요 아무도 우리에게 그의 모든 지식을 줄수없죠 줄 수 있다 해도 하루만에 우리에게 줄 수는 없을 거예요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사람은 다른 시기에 다른 것을 얻어야 할 겁니다

매우 현명한 대학 교수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처럼 되고 싶으면 수년 동안 그와 함께 배워야 하고 차근차근 해야 할 겁니다 그가 하루에 우리의 높은 수준의 질문을 모두 답할 수 없지요 어째든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요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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